감미로운 소리방

진주라 천리길 ~! -남인수

꼭두쇠- 2011. 9. 20. 00:47

 
 진주라 천리길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
촉석루에 달빛만 나무 기둥을 얼싸안고
아~ 타향살이 심사를

위로할 줄 모르누나

 

진주라천리길을  어이 왔던고
연자방아 돌고돌아 세월은 흘러가고
인생은 오락가락 청춘도 늙었으나
늙어가는 이 청춘에 젋어가는 옛 추억
아~! 손을 잡고 헤어지던 그 사람
그 사람은 간 곳이 없구나~~!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
남강가에 외로이 피리 소리를 들을 적에
아~ 모래알을 만지며
옛 노래를 불러 본다

 
 
 진주라천리길-남인

 
 진주라천리길-김용임
 
[노래출처:http://cafe.daum.net/musicplaza915]
 
 

[노래에 얽힌 관련자료]

 

이 노래는 1941년도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발매된 조명암작사(이가실), 이면상작곡(이운정), 이규남이 불러 힛트한 노래로서 대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이규남 -- 충남, 연기태생이며 본명은 유건혁이다. 휘문고보 졸업 후 도쿄고등음악학교에서 수학 후에 1932년 경, 임헌익이라는 이름으로 콜롬비아레코드에서 데부하여 <봄노래><빛나는강산>등을 발표했고, 1936년경에 빜타레코드로 이적하여 이규남으로 <고달픈 신세><낙동강 칠백리>등을 발표하여 큰 인기를 얻게된다.

 

그후 1941년경에 콜롬비아로 다시복귀하여 <진주라천리길>-이 노래를 발표해 지식층을 포함한 폭넙ㄹ은인기를 얻어 많이 불리웠다. 해방후에는 악극무대에서도 활동했는데 그후에 월북하였는바 그의 원북동기가 일본 도쿄음악학교 동기동창인 이면상의 권유에 따라 월북했다는 설과 자의로 3.8선을 넘었다는 설이있으나 어느것이 맞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함.

 

월북작가의 노래로 금지곡이돼어 노년층의 뇌리에서 사라진듯하녔으나 해금됨으로 다시 불리원져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해방전후에 대중예술인들 중에 많은 사람이 북으로 넘어 갔는바 그당시 남로당에 포함된 가요인들도 있었고, 남쪽에서는 그들의 활동범위가 좁아 부득히 북으로 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월북 후에 사화주의 이념에 적응하여 예술활동을 함으로서 상당한 위치에 오른 자도 있지만, 반대로 사상적 비판을 받아 말로는 비참하게 생을 마친 예술인도 있었을 것이다.

 

 

<자료 출처 :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