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모니카 연주방

[스크랩] 희망가

꼭두쇠- 2011. 11. 4. 22:55

 

 < 희 망 가 >

 

 

(트레몰로 C key) 

 

 

<희망가>  - 채규엽 노래 -


 1.

풍진(風塵)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富貴)와 영화(榮華)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하늘 밝은 달아래
곰곰히 생각하니

세상 만사(世上萬事)가 춘몽(春夢)중에

또 다시 꿈같도다.


2.
풍진(風塵)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富貴)와 영화(榮華)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담소화락(談笑和樂)에 엄벙덤벙

주색잡기(酒色雜技)에 침몰하니
세상 만사(世上萬事)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희망가에 대하여- 

  지금은 꼭 그렇지도 않지만 노래방이 처음 등장했을 무렵 노래목록 끝번은 어디든 예외없이 '희망가'였다. 누가 작사하고 작곡했는지, 언제쯤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별다른 기록도 없이 그저 채규엽이라는 가수가 불렀다고만 되어 있어 애매해 보이는 노래이지만,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로 시작하는 가사 첫머리는 누구든 한번쯤 들어 보았을 대목이다. 

 

이 노래는 1919년 3.1운동 직후부터 널리 불리기 시작했다는데, 1922년에 나온 노래집에는 '청년경계가'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고, 이어서 전국적인 유행에 힘입어 일축(일본축음기상회)에서 음반으로도 발매되었다. 음반 발매 당시에는 다시 제목이 바뀌어 '이 풍진 세월'로 나왔는데, 시기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1925년 이전에 나온 것임은 틀림이 없으니, 음반에 취입된 것으로는 우리나라 유행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 된다. 

 

'이 풍진 세월'은 박채선, 이류색 두 사람이 함께 불렀는데, 이름으로 보아 이들은 기생이었던 것 같다. 이들은 '이 풍진 세월'과 함께 '사랑가', '축구가'라는 유행가를 같은 음반에 취입하기도 했으나, 유행가보다는 '개성난봉가', '방아타령' 등 경서도 민요를 더 많이 불렀다. 그 때문인지 '이 풍진 세월' 역시 이렇다 할 반주도 없이 무슨 타령을 부르는 듯한 창법이 꽤나 생경하게 들리는데, 손장단을 맞추며 듣다 보면 고졸하면서도 구성진 맛이 느껴진다. 

 

앞줄 오른쪽-김산월, 왼쪽-도월색 

('유성기에 소리 너흔 기생' 시내 황금정에 있는 일본축음기회사 경성지사에서는 조선기생의 소리를 판에 넣었는데 사진은 판에 소리를 넣고 있는 조선의 명창 기생들...)

박채선과 이류색이 취입한 '이 풍진 세월'은 조금 뒤에 제목이 '탕자경계가'로 바뀌어 다시 소개가 되었다. 이어 1925년에는 일본 유행가 번안곡을 잘 불러 '일본 소리 유행가의 총아'로까지 불리던 기생 김산월과 도월색이 함께 부른 '이 풍진 세상을'이 같은 일축에서 나왔고, 1926년에는 역시 기생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김죽사가 부른 '이 풍진 세상'이 일동레코드에서 발매되었다. 분명 같은 노래이지만 제목이 조금씩 다른 것을 볼 수 있는데, 가사 역시 취입할 때마다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이처럼 같은 노래를 제목과 가사, 가수만 바꾸어 계속 음반으로 낸 것을 보면, 당시 '이 풍진 세월'의 유행이 굉장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도대체 이 '희망가', 아니 '이 풍진 세월'을 지은 사람은 누구일까? 다행히도 작곡자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1936년에 콜롬비아레코드에서 김안라가 발표한 '동무의 추억'이라는 노래를 보면 가사지에 작곡자가 '가튼'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그 곡조가 '이 풍진 세월'과 거의 일치한다. 

 

'이 풍진 세월'의 원곡은 1890년에 나온 일본 창가집에 실려 있던 '夢の外'로 지은이는 토마스. W. 가든(トマス. W. ガ-ドン)이라는 서양인이었다. 이 곡은 1910년에 '七里ヶ浜の哀歌(시찌리가하마의 애가)', 일명 '眞白き富士の嶺(새하얀 후지한 봉우리)'라는 제목이 붙어 일본에서 크게 유행했으며, 이후 음반 취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眞白き富士の嶺'라는 제목은 노래 첫머리에서 따온 것인데, 5절로 된 가사는 시찌리가하마라는 해변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은 학생들을 애도하는 내용으로 三角錫子라는 교사가 지은 것이었다.

 

眞白き富士の嶺綠の江ノ島 

仰ぎ見るも今は淚 

歸らぬ十二の雄雄しき魂に 

捧げまつる胸と心 

 

ボ-トは沈みぬ千尋の海原 

風も浪も小さき腕に 

力もつきはて呼ぶ名は父母 

恨みは深し七里が浜邊 

 

み雪は咽せびぬ風さえ騷ぎて 

月も星も影をひそめ 

み魂よ何處に迷いておわすか 

歸れ早く母の胸に 

 

み空にかがやく朝日のみ光り 

暗にしずむ親の心 

黃金も も何しに集めん 

神よ早く我も召せよ 

 

雲間に昇りしきのうの月影 

今は見えぬ人のすがた 

悲しさ余りて寢られぬ枕に 

響く波の音も高し 

 

歸らぬ波路に友よぶ千鳥 

われも戀し失せし人よ 

盡きせぬ恨みに泣くねは共ども 

きょうも明日も斯くてとわに

 

이렇게 애달픈 내용으로 1910년대 일본에서 유행하던 것이 다시 우리나라로 건너와 '이 풍진 세월'이라는 제목과 새로운 가사로 바뀌어 다시 크게 유행한 것이다. '동무의 추억'은 원곡인 '眞白き富士の嶺'의 곡조와 가사 분위기에 보다 충실하려는 의도로 시인이자 당시 콜롬비아레코드 문예부장으로 작사를 하던 이하윤이 다시 가사를 손질해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너 간 곳이 어드메냐 사랑하는 우리 친구 

새 울고 꽃 피는 그 봄은 다시 와 

동산에는 나비 날고 시냇물은 흐르건만 

가버린 동무야 무심도 하구나 

 

뜰 앞에서 지는 낙엽 가엾다고 울던 네가 

봄 오자 갈 줄야 꿈엔들 꾸었으랴 

다시 못 올 그 나라로 우릴 두고 홀로 갔나 

피려다 져버린 애처로운 꽃망울 

 

네 무덤을 찾아오니 잔디 더욱 푸르구나 

가을이 설워서 달 보며 울던 너 

찬 눈 덮인 이 속에서 한겨울을 지냈는가 

너 잃은 우리들 헤어지는 봄이라

  

'이 풍진 세월'의 작사자는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가사가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을 풍미했던 허무주의적 분위기를 짙게 드러내면서 상투적인 어구를 종종 사용하고 있다는 점과, 음반이 새로 발매될 때마다 제목과 가사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민요와 같이 사실상 당시 민중 전체가 작사에 참여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알 수 없는 그 누군가가 가사의 기본적인 뼈대는 창작했을 테지만, 노래의 대대적인 유행은 시대와 민중의 정서를 반영하는 생명력 있는 가사가 계속해서 공급되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이 풍진 세월'이 현재 채규엽의 '희망가'로 알려져 있는 것은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일까? 채규엽이 처음 음반을 발표한 것은 1930년이고 이후 1935년 말까지는 콜롬비아레코드사에서만 활동을 했으므로, 그가 '희망가'를 취입했다면 아마 1930년 이후 콜롬비아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 내역이 거의 완벽하게 밝혀져 있는 콜롬비아 음반 목록에서 채규엽의 '희망가'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앞으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될 여지가 없지는 않지만, 채규엽이 부른 '희망가' 음반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채규엽이 무대에서 '이 풍진 세월'을 자주 불렀을 수는 있을 것이니, 그것이 당시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아예 채규엽의 노래로 인식되고, 가사 가운데 '나의 희망이 무엇인가'에서 제목을 따서 '희망가'로 정착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해 볼 수 있겠다. 

 

허무적인 분위기 탓에 비판적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노래의 형성 과정이나 연주 방식 등에서 보이는 특징은 '이 풍진 세월'을 유행가시대의 첫 자리에 놓기에 부족함이 없다. 서양음악에 기반을 두면서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다시 그것을 우리 방식으로 소화시켜 낸 과정은 이후 유행가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에 중요한 참고가 된다. 이미 익숙한 '희망가'로서도 좋지만, '이 풍진 세월'로 다시 들어 본다면 옛적 그 맛을 한결 절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퍼옴) 

 

 

출처 : 하모사랑 - 하모니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글쓴이 : 하모가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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