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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제천시] 청풍명월, 청풍문화재단지 탐방..

꼭두쇠- 2014. 10. 28. 18:00

2014년10월28일(화) 그간에 가려다 가 보지 못한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년전에 단양팔경을 돌면서 충주호 유람선에서 올려다 보았던 청풍망월루..

오늘에야 제천역에서 청풍면소재의 청풍문화재단지행 시내버를 타는 것으로 탐방한다.

 

청풍은 자연 경관이 수려하고 문물이 번성했던 곳으로 많은 문화 유적을 갖고 있었으나 충주댐 건설로 청풍면 후산리, 황석리, 수산면 지곡리에 있던 마을이 문화재와 함께 수몰될 위기에 있었다. 충청북도청에서는 1983년부터 3년간 수몰 지역의 문화재를 원형대로 현재 위치에 이전, 복원해 단지를 조성했다.

단지에는 향교, 관아, 민가, 석물군 등 43점의 문화재를 옮겨 놓았는데 민가 4채 안에는 생활 유품 1,6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고려 때 관아의 연회 장소로 건축된 청풍 한벽루(보물 528)와 청풍 석조여래입상(보물 546) 등 보물 2점과 청풍부를 드나들던 관문인 팔영루(충북유형문화재 35), 조선시대 청풍부 아문인 금남루(충북유형문화재 20), 응청각(충북유형문화재 90), 청풍향교(충북유형문화재 64) 등 건축물 및 옛 도호부 시대의 부사나 군수의 송덕비, 선정비, 열녀문, 공덕비 등이 세워져 있다.

[네이버지식백과] 청풍문화재단지 [淸風文化財團地]
[참고 관련 자료]    대한만국 구석구석

 

제천 청풍 팔영루(八泳樓)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

청풍부를 드나들던 관문으로 팔영루는 조선 숙종 28년(1702) 부사 이기홍이 창건하고 남덕문이라 한 것을 고종7년(1870)에 부사 이직현이 중수하였는데 고종때 부서 민치상이 청풍명월의 8경을 시제로 한 팔영시가 있어 팔영루라 부르고 있다. 건물구조는 높이 2.2m 석축기단을 쌓고 그 중앙에 4각의 문을 내었으며 기단위에 누락을 세웠다. 팔영루의 현판은 부사 민치상의 글씨이고 출입문 천장의 호랑이 그림은 구전에 의하면 청풍의 재난(수해)를 막기 위하여 그려졌다고 한다.

 

 

소에 얽힌 전설과 연자방아를 그려낸 설치물..

 

* 청풍 황석리 고가

이 집은 본래 청풍면 황석리 164번지에 있었던 민가이다. 충주댐의 건설로 1985년 지금의 자리로옮겨 복원한것이다. 집의 구조는 안채와 문간채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 겹머리 기와집이며, 조산말기의 건축물로 좌측(서쪽)으로부터 부엌, 안방, 웃방을 나란히하고 끝에 사랑방을 두었다. 아방과 웃방 앞에는 길게 툇마루를 두고, 사랑방 퇴는 부엌으로 구성하였다. 툇마루와 사랑부엌 사이의 퇴주(각주) 이름이 특이하다. 문간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초가집이다.

 

 

* 청풍 도화리 고가

이 집은 본래 청풍면 도화리에 있었던 민가였다. 충주댐의 건설로 198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조선 말기에 지어진 ㄷ자형의 우진각 기와집이다. 중앙에는 3칸 크기의 대청을 이루고, 좌측 간살은 방, 부엌, 광으로, 우측 간살은 방2칸과 2칸 크기의 부엌으로 되어 있다. 둥근 통나무 굴뚝과 부엌 살자창옆의 관솔을 피워 어둠을 밝히는 시설은 태백산맥 일대의 산간지대 민가에서 볼 수 있는 특징적인 것이다. 본래 이전하기전의 흔적으로 보아 앞쪽에는 바깥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튼 ㅁ자형의 배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 청풍 후산리 고가

이 집은 본래 청풍면 후산리 105번지에 있었던 민가였다. 충주댐의 건설로 198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조선말기에 지어진 ㄱ자형의 팔작 기와집이다. 대청마루를 기준으로 하여 동남을 향하고 있다. 대청의 우측에 2칸 크기의 건너방과, 툇마루를 높이 하고 그 밑에 함실 아궁이를 두고 있다. 대청은 좌측으로 웃방이 있고 웃방에서 동쪽으로 꺾어 대청의 좌측으로 후퇴를 후보하여 제사방으로 꾸미고있다. 전체적인 내부의 배치가 특이하다. 중부지방의 보편적인 민가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청풍호(충주호)를 내려다 보며 분수와 유람선을 본다.

 

호랑이와 김중명

청풍 김씨 김중명은 인조 을유면 무과에 올라 선전관에 발탁되었는데 과거에 급제한 후 부친 산소 성묘길에 묘 뒤에 숨어있던 큰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다. 따라온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자 증명이 말에서 내려 크게 고함을 지르며 곧장 나아가 발로 호랑이를 차서 죽여 버리니 그 용맹에 탄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출처: 매산집)

 

 

석물군(石物群).

문화재단지 조성 당시.고대사회의 장례풍속을 엿 볼 수 있는 선사시대 무덤인 지석묘 5점과 문인석 6점. 조선시대 군수나 부사의 공덕비, 송덕비, 선정비 12점 등 비지정 문화재 32점을 옮겨 놓았으며 1997년 제천향교에서 비석 10점을 추가로 옮겨 이곳에 배치함으로서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남한강변의 비석문화를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뒷편에 양반고장의 온화한 심성과 청풍명월의 본고장을 상징하는 청풍명월(淸風明月) 비석을 1985년 12월 23일 문화재단지 개장기념으로 건립하였으며 이 비석은 높이 8m, 둘레85cm로 돌의 원산지는 수산면 능강리 취석대 부근 화강암으로 석파 현수근님의 글씨이다.

 

 

* 제천 청풍 응청각(凝淸閣)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

이 건물의 용도는 알 수 없으나, 본래 한벽루의 좌측에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처음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명종 초 이황(1501~1570)이 단양군수로 있을때 '응청각'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인조15년(1637)에 충청감사 정세규의 일기에 응청각에서 유숙한 기록이 있다. 고종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중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198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2층 누각으로 아래층은 토석축의 담으로 벽을 막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건물 좌측에 목조 계단을 만들어 2층으로 오르내리게 하였다.

 

 

* 제천 청풍 한벽루 (보물 제528호)

이 건물은 고려 충숙왕4년(1317)에 청풍현이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관아의 부속건물이었다. 1972년 대홍수로 무너진 것을 1975년 원래의 양식대로 복원하였다. 이 루는 석축토단의 자연석 주초석 위에 기둥이 배가 부른 엔타시스 수법을 쓴 층 아래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설치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팔작지붕에 주심포계 양식이다. 누의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계단식 익랑(대문간에 붙여 지은 방)을 달았다.

 


*제천 청풍 금남루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호)

이곳은 청풍부의 아문으로 '도호부절제아문'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순조25년(1825)에 청풍부사 조길원이 처음 세우고 현판도 걸었다. 고종7년(1870)에 부사 이직현이, 동 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각각 중수하고 1956년에도 보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의조성으로 인하여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정면3칸, 측면 2칸의 팔각집으로 팔각의 높은 돌기둥 위에 세운 2층의 다락집이다.

 

* 제천 청풍 금병헌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

이곳은 청풍부의 청사로 쓰였던 동헌건물이다. 청풍은 삼국시대에 사열이현이었으나, 신라 경덕왕때 청풍현이라 하였다. 고려 충숙왕 때 지군사가 되고, 조선 세조 때 군이 되었다. 현종 초에 도호부로 되었으며, 고종32년에 군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국역의 통폐합에 따라 청풍면이 되었다. 이 건물은 숙종7년(1681)에 부사 오도일이 처음 지었다. 그후 숙종 31년(1705)에 부사 이희조가 중건하고, 영조2년(1726)에 부사 박필문이 중수하고, 권돈인이 편액을 써서 걸었다. 고종 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전면 보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인하여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정면 6칸, 측면3칸의 팔작집이다. 일명 명월정이라고도 하며, 내부에는 '청풍관'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멀리 머리 위로 관수정이 부른다..

 

관수정...

 

* 연리지와 연리목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맞닿은 채로 오랜세월이 지나면 서로 합쳐져 한나무가 되는 현상을 연리라고 한다. 두몸이 한몸이 된다하여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과 흔히 비유하였다. 알기쉽게 '사랑나무' 라고도 부른다. 나무가지가 서로 이어지면 연리지, 줄기가 이어지면 연리목이다. 연리목은 가끔 볼 수 있으나 가지가 붙은 연리지는 매우 희귀하다. 가지는 다른 나무와 맞닿을 기회가 적을 뿐만 아니라 맞닿더라도 바람에 흔들려버려 좀처럼 붙기 어렵기 때문이다.

 

 

망월정에 오르는 길에서  내려다 보이는 관수정, 금병헌, 한벽루..

 

망월정오르는 길목에서 멀리 청풍대교와 청풍호(충주호)

 

망월루

 

* 제천 청풍 망월산성 (충청북도 기념물 제93호)

청풍대교 남쪽 망월산(해발373m)의 정상부와 지맥을 둘러 쌓은 석정지로 둘레가 495m의 작은 성인데 문지는 북쪽 너비 3.0m의 것이 1개소 있고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서남쪽에 너비 16.0m의 성벽과 남쪽에 너비 16.0m 높이 4.6m의 성벽이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성내에서는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토기, 기와조각이 몇 점 수집된바 있으며, 삼국사기에 신라문무왕 13년(673)에서 서열산성을 더 늘려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인 삼국시대에 축성되었으리라 보여진다. 또한 이곳은 문화재 단지 입구에서 망월산 정상까지 500m에 위치해 망월산성 주변을 산보하며 주변경관을 조망할 수 있으며 약30분 정도 소요되는 500m의 산책로가 조성되어 가벼운 등산코스로 최적지이며, 정상에는 전망대인 망월루가 있어 청풍호반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관광명소이다.

 

단지내 산책코스의 단풍과 낙옆길..

 

관람객에게는 전시가 허용되지 않은 청풍향교..

 

산책로의 화장실과 돌탑..

 

* 석조여래입상 (보물 546호)

이 불상은 높이가 341㎝이고, 전체적인 조각 양식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기(10세기 경)의 작품으로 보인다. 불상의 얼굴 모양은 풍만하고 자비로운 상으로 두툼한 양볼에 인중(코와 입술 사이의 우묵한 곳)이 뚜렷하고 두 귀는 양어깨까지 드리워졌다. 목에는 삼도가 새겨져 있으며, 왼손은 땅을 가르키고 있다. 옷은 통견의(양어깨를 덮은 법의)를 걸치고 안에 속내의를 받쳐입고 있으며, 배에서 매듭을 지어 V자형으로 겹겹이 대좌에까지 내려왔다. 충주댐건설로 수몰지인 청풍면읍리에서 1983년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지곡리 고가...

 

팔영루의 안쪽 모습..

 

아래에서 올려다 보이는 망월루..

 

수몰 역사관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수몰역사관..

 

산책로에서 만나는 장미터널과 쉼터 그리고 낙엽진 산책로..

 

청풍호 가운데의 분수과 청풍나루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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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를 빠저나와서 청풍문화재단지 후문..

 

후문을 따라서 이어지는 기와를 올린 흙담과 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