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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북악산 "서울성곽"을 탐방하였습니다.[사적 제10호]

꼭두쇠- 2009. 11. 1. 13:03

 

 

여름 휴가를 미루어 오다가 오늘(2009.09.18) 개인 적으로는 뜻 깊은 날에 북악산 [서울성곽]을 올랐습니다. 여러 코-스 중에서 저는 안국동 지하철역을 출발하여 성균관대학교 후문, 와룡공원을 기점으로 인왕산 코스의 창의문을 종점으로하는 완만한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종로 3가의 잘 다니던 식당에서 가볍게 점심을 마친 후, 지하철3호선을 타고 안국역에서 내려 2번출구에서 마을버스 2번을 타고 고급 주택가와 한옥이 자리한 명륜동 골목길을 지나 성균관대학교 후문까지의 고불고불한 산책길을 지나면서 아름답고 우거진 숲이 "서울시내에 이런곳도 있었구나~!" 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왔지요.  
  

우선 [사적 제10호]로 등제된 [서울성곽]의 역사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겠지요? 

 

 

    서기1392년 개성 수창궁에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지 한달이 못 되어 한양천도를 명하고, 태조 4년(1395년) 경복궁, 종묘, 사직단의 건립이 완성되자 곡바로 정도전이 수립한 도성축조 계획에 따라 서울성곽을 수축하기 시작하였다.  

 

----- 중략---- 

 

    이후, 1899년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차를 부설하면서 동대문과 서대문 부근의 성곽 일부가 헐려 나갔고, 이듬해에는 용산과 종로 사이의 전차부설을 위해 남대문 부근을 철거하게 되었다. 일제 강정기에 들어서면서 서대문과 혜화동(동소문)이 헐리며 사실상 서울의 평지성곽은 모두 철거되어 오늘날에는 총 길이 18.2km 중 산지성곽 10.2km만 남게 되었다.

 

[참고자료] http://www.bukak.or.kr   [자연이 내린 북악산 서울성곽] 
                 http://www.bukak.or.kr/Main.asp?code=history  [서울성곽의 역사]

                 http://www.bukak.or.kr/Preview.asp   [서울성곽 탐방안내] 

 

지금 역사공부를 하자는 것이 아니기에 저는 이제부터 탐방을 시작하겠습니다.

 

 


성균관대 후문에서 마을버스르 타고 올라 왔던 길을 뒤돌아 보았습니다.
지금도 공사가 한창인 길옆의 우거진 수목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서울성곽을 오르는 여러 길목에서 저는 와룡공원을 기점을 잡았습니다,

[와룡선생상경기]라는 책이 떠 올라서 샷터를 눌렀지만,

여기가 그 선생을 그리는 자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서서히 드러나는 서울성곽,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하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합니다~~

 


서울성곽의 전체적인 규모를 설명하는 안내표지판 (첫 사진에서 안내하는 것과 같은 것)

 


와룡공원을 뒤로하고 길게 뻣어난 성곽이 탐방객을 반겨 주고 있습니다.

 


서울성곽을 오르기 위한 안내소와 신고소가 있는 [말바위쉼터]안내판과
지역의 특성상 유난히도 제약이 많은 금지행위 안내판입니다.

 


거대한 모습으로 다가선 [서울성곽], 홀로 걷는 탐방객이 외롭기만 하고,
길게 뻣어난 거대한 성벽에 선조들의 위대함을 느끼게 합니다.

 


자연의 생명력은 모질고 끈질기다고 했던가 ?
성벽 틈새에 뿌리를 내린 생명력과 자연의 조화에 감탄할 뿐입니다.

 


말바위 쉼터를 향해 오르는 계단은 힘겨울 것 같기만하고~~

 


멀리 뻣어난 성벽은 그 길이를 가름할 수 없는데~~

 


성곽을 따라서 탐방도로가 잘 다름어져서 걷기엔 아주 편하고 완만했습니다.

 


와룡공원에서 10미터를 올라오니 이정표가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삼청공원으로 가고,
앞으로(사진우편) 진행하면 북악산 서울성곽 탐방로(말바위쉼터)로 길을 안내합니다.

 


500여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건재함을 자랑하는 성곽~!
그리고 말없이 지난 세월을 굽어 본 수목들이 우리를 평화롭게 맞이합니다.

 


여기가 말바위 안내소입니다. 각종 신분증을 제시하고 탐방신청서를 작성하여 제출하면

목에 걸 수 있는 방문증(번호표)를 교부합니다.

여기서 부터는 방문증(번호표)이 신분증을 대신하며 목에 걸고 올라야 합니다.

 


장엄하기가지한 숙정문입니다. 아래에 간략하게 설명한 내용을 참조해 보심도~~.

 

서울성곽을 이루는 사대문() 가운데 하나로, 도성의 북쪽 대문이다. 1396년(태조 5)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1413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린 뒤에는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이후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숙청문이 숙정문으로 바뀐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년(중종 18)이다. 숙정문 외에 북정문()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자료] http://100.naver.com/100.nhn?docid=797640

 


숙정문을 살짝 비켜 성곽과 연결하여 촬영해 보았습니다.

 


숙정문의 문루(성루)에 올라 보았습니다. 옛 조상들의 숨소리가 들리고,
장군의 호령과 군졸들의 함성이 들리는듯 감회가 새롭기까지 했습니다.

 


문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저 건물은 삼청각(홍련사 쉼터)으로,

오르기 전에 우측으로 꺽어 내려가면 나오지요.
다만, 그쪽을 구경하기 위해서 방문증을 반납하여야 하고,

성곽길을 들어 올 때에 다시 신청서를 써야 한답니다.

 


일명, '촛대바위'라고 한다는데 청운대에서 바라보면 모습이 확실히 보인다네요.

높이는 약 13미터정도, 촛대바위의 지석은 1920년 일제강점기 민족정기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쇠막뚝을 박았던 곳이라고 하며, 주변의 소나무 숲과 어루러져 경복궁을 비롯한

서울도심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습니다.

 


멀리 높다란게 쌓은 성벽은 올라가야 할 중턱에 자리하고 빨리 올라오라고 제촉하는 것 같고,

 


한 계단씩, 한부럭씩 정교하게 쌓은 성벽은 선인들의 땀과 정성이 깃들여져서
500여년을 지켜오고서도 아직도 건재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호기심에 가득찬 모습으로 다람쥐가 성벽틈에서 나와 사람구경에 넋을 잃은듯~
지나는 탐방객을 반갑게 맞아 주기도 하고~~

 


손에 잡힐듯 서울시내복판(경복궁과 세종로 일대)이 안개속에 들어오고,
군 시설물 촬영 금지 표지판은 아직도 전쟁 중인듯, 가슴을 쓸어 내리게 합니다.

 


장엄하기까지한 성벽아래의 탐방객은 왜소하게 느끼게 하고도 남고,

 


일명 1.21사태 소나무로 불리는 이 소나무는 41년전 김신조를 비롯한 124군부대의 청와대
습격사태에
총알을 15발이나 맞고서도 오늘까지 건재한 모습으로 탐방객을 맞고 있습니다.
(군대군대 치료의 흔적으로 15발의 상처를 확인할 수 있었지요)


저멀리 보이는 계단은 132계단이라고 하는데 건너편 900여 계단과 비교가 될까??

 


청운대(청운산:해발293미터)를 뒤로 오르다 보면 백악마루(백악산:해발332미터) 쉼터를
안내하는 표지판으로
뒤로는(좌측) 숙정문, 앞으로는(우측) 창의문의 갈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백악마루 쉼터에서 좀 내려오는 길목에서 잠간 쉬면서 한 컷 찰칵~~!
보이는 나무계단은 창의문에서 여기까지 900여개의 계단으로 오르기에 힘겨울 듯하고
건너편의 탐스럽게 익어가는 알밤은 치외법권지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답니다.

 


창의문 안내소의 서울성곽 탐방시간을 알려주는 표지판으로 오전10시부터 오후2시까지 라고
표시되어 있고
백악마루 쉼터에서 여기까지 풍광도 좋고 사진찍기 좋았지만 제약이 많아 찍지 못해
아쉽기만 하고
한번씩 탐방해서 역사도 배우고 아름다움도 만끽해 보심은 어떠실지요?

 


서울성곽의 시작이자 종점인 자하문이라고도 하는 창의문.

 

북문() 또는 자하문()으로도 불린다. 1396년(태조 5) 서울 성곽쌓을 때 세운 사소문()의 하나로 창건되어 창의문이란 문명()을 얻었다. 북한() ·양주()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으나 1416년(태종 16)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이 곳의 통행이 왕조에 불리하다 하여 폐문()한 채 일반의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다시 열어놓았다.

1623년 인조반정() 때는 능양군(:인조)을 비롯한 의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문루()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740년(영조 16) 다시 세우고 다락 안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판에 새겨 걸었다. 1958년 크게 보수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서울 사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완전히 남아 있는 문이다. 

 

[참고자료] http://100.naver.com/100.nhn?docid=145114

 


이제 창의문을 뒤로하고 아쉬운 서울성곽 탐방을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고고하게 자리한 이 창의문과 서울성곽~! 대대손손 지켜야 할 우리의 유산이겠지요?

 


41년전 1.21사태에 작전을 지휘하다가 순직한 최경식 경무관의 동상과 안내판.
그 옆에는 함께 순직한 정종수 경사의 비석은 어쩐지 초라하게 느껴지네요. 
 

 

[참고자료] "자연이 내린 북악산 서울성곽" 홈페이지 http://www.bukak.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