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숲으로 초대합니다 한라산 둘레길
숲이 다 거기서 거기겠지, 한라산이라고 뭐가 다르겠어?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한라산 정상 등반에 앞서 탐색하는 셈 치고 다녀온 한라산 둘레길. 시작은 그러했다. 허나 걷기를 끝마칠 무렵, 처음 가졌던 생각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한라산 둘레길 표지판
한라산 자락을 휘감아 도는 길 한라산 둘레길은 제주 중산간 지역 해발 600~800m 지대에 분포된 병참로와 임도, 표고버섯 재배지 운송로 등을 활용해 조성하고 있는 숲길이다. 한라산 자락을 휘감아 도는 환상숲길로서 한라산국립공원에 집중되는 탐방객 수요를 분산시키고 한라산의 역사, 생태, 산림문화를 체험하는 학습장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동백길, 한라산 둘레길 1구간을 걷다
무오법정사 항일항쟁기념탑
일명 동백길로 불리는 한라산 둘레길 1구간. 서귀포 자연휴양림 부근 무오법정사에서 출발해 돈내코계곡을 지나 서귀포 학생문화원 야영수련장까지 14.2km에 달하는 숲길이다. 한라산 둘레길 안내 표지를 따라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숲속 작은 공터에 무오법정사 항일항쟁기념탑이 나타난다. 무오법정사는 일제강점기 제주도 최초이자 최대의 항일운동이 벌어졌던 역사적인 곳이다. 당시 일본 순사들이 불을 질러 지금은 일부 건축물의 흔적만 남아 있지만,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도 전에 벌어졌던 무장 항일운동이었다. 항일항쟁기념탑 앞에서 잠시 묵념을 올리고 다시 길을 재촉한다.
기념탑을 지나면 본격적인 둘레길 탐험이 시작된다. 짙은 녹음이 우거진 오솔길 입구에 기둥처럼 양쪽에 돌탑을 쌓아 올려 만든 ‘한라산 둘레길’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어딘지 모를 깊은 숲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묘한 기분이 들지만 경계심은 이내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바뀐다. 야자수 열매 껍질을 활용한 친환경 매트가 카펫처럼 깔려 있어 발걸음이 훨씬 편안하다.
제주에서 흔치 않은 풍경, 계곡길
한라산 둘레길을 걷다 만나게 되는 다양한 모습의 계곡들
숲길을 부지런히 오르락내리락 하기를 몇 차례. 어디선가 시원하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눈앞에 계곡 하나가 펼쳐진다. 제주도에서 흔치 않은 풍경이 바로 이 계곡이라 예상하지 못한 광경에 걷는 맛이 절로 난다. 숲길을 걷는 동안 크고 작은 계곡을 꽤 많이 만난다. 며칠 전 내린 비 덕분에 계곡마다 맑은 물을 품고 있어 눈 호강 한번 제대로 했다. 거대한 암반에 둘러싸인 깊은 계곡부터 새까만 현무암에 푸른 이끼가 잔뜩 끼어 있는 독특한 절경의 이끼천, 옛날 설문대할망이 아무렇게나 던져놓았을 것 같은 울퉁불퉁한 바위들로 가득한 마른 계곡 등 저마다 다른 모습을 지닌 계곡들이 심심하면 한 번씩 나타나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들만의 세계에 초대받다
동백나무 군락지
첫 번째 계곡을 지나자 바로 동백나무 군락지가 나타난다. 한라산 둘레길 1코스가 동백길로 명명된 것은 이곳 때문이다. 아쉽게도 개화 시기가 아닌 탓에 울긋불긋 꽃대궐을 구경하진 못했지만, 붉은 동백꽃이 지천으로 널렸을 풍경을 상상하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한라산 둘레길에는 동백나무를 비롯해 꽝꽝나무, 졸참나무, 서어나무, 윤노리나무 등 온갖 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 야생동물인 매와 팔색조, 큰오색딱따구리, 박새, 검은댕기해오라기 등 많은 조류와 각종 양치류도 서식하고 있다. 워낙 깊은 숲속인지라 간혹 물이 고인 습지나 길 중간에서 뱀을 만날 수도 있다. 보통 어른 손가락 굵기만 한 작은 뱀이지만 독을 품은 것들도 있으니 조심하자. 걷는 도중 두 번이나 뱀과 마주쳤지만 서로 먼저 지나가기를 양보하니 특별한 위협은 없다.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상호 평화가 유지된다. 인간 세계와는 다른 이곳 생태계의 말없는 질서다.
둘레길 곳곳에 독버섯이 자라고 있다.
숲길을 걷는 내내 이름 모를 풀벌레와 새들의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결코 소음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낯선 세계의 이방인을 경계하는 소리인지 아니면 환영의 팡파르인지 알 길이 없다. 그냥 속 편하게 우리를 위해 노래해주는 거라 생각한다. 그러고 나니 숲이 훨씬 아름답고 신비롭게 다가온다. 숲의 정령에게 초대된 듯한 착각에 빠져 걷다 보니 딱히 쉬지 않아도 발걸음이 가볍고 하나도 힘든 줄을 모르겠다.
숲길에 새겨진 역사의 흔적
깊은 산중에 만들어진 숯가마터
얼마나 걸었을까. 길섶에 ‘숯가마터’라는 표지판이 서 있고, 그 뒤로 돌무더기가 사람 키만큼 쌓여 있다. 1940년대부터 1970년도까지 한라산 곳곳에서 이 같은 숯가마터를 축조해 숯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늘마저 잘 보이지 않는 숲속에 몇 날 며칠을 머물며 숯을 구워내는 일은 얼마나 고되고 외로웠을까. 허물어져버린 가마터를 보며 왠지 모를 짠한 감정이 마음에 스민다.
아픈 역사를 간직한 4·3사건 유적지
이보다 마음이 더 아련해지는 흔적은 4·3사건 유적지다. 깊은 산중에 웬 돌담인가 싶었는데 당시 산으로 도망친 사람들을 수색하기 위해 토벌대가 구축한 주둔소의 흔적이다. 1945년까지 산골 구석구석에 약 25개의 경찰 초소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왠지 모르게 음습한 기운이 느껴지는 4·3사건 유적지 위로 영화 <지슬>의 한 장면이 오버랩된다. 마을 주민들이 토벌대에 쫓겨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던. 고요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감도는 산골짜기에 총성이 울려 퍼지고, 육중한 군홧발에 짓눌려 더 이상 갈 곳 없는 사람들의 숨이 끊어질 듯한 비명 소리. 한라산은 그저 말없이 그 암울했던 역사를 가슴에 품어 안을 뿐이다.
온몸을 정화시키는 치유의 숲길
무거워진 마음을 달래줄 심산인지 곧이어 나타난 삼나무 군락지가 꽉 막힌 가슴을 뻥 뚫어준다. 나무 밑동에 걸터앉아 쉼 없이 걸어온 길에 쉼표를 찍는다. 하늘 높이 쭉쭉 뻗은 가지들을 올려다보자니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다. 숲은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데, 몸은 물론이고 마음까지 가벼워지는 것이 10점 만점에 10점을 능히 넘는다.
한라산 둘레길 1구간은 도보로 보통 4~5시간 소요된다. 자신의 체력을 감안해 거리를 조절하는 것이 좋다. 둘레길 입구에서 시오름 갈림길까지 2시간 남짓. 이곳을 지나면 숲속의 오솔길을 통해 산록도로변으로 나갈 수 있는 갈림길이 하나 더 나온다. 숲속의 오솔길로 빠져나갈 요량이라면 둘레길로 이어진 편백나무 숲만큼은 잠깐 다녀갔다 나가자. 코끝에 전해지는 건강한 숲의 기운이 온몸을 정화시켜주는 기분이다. 둘레길을 끝까지 완주하겠다면 편백나무 숲을 따라 계속 걸어가면 된다. 길은 조금 으슥하고 험해지며 때론 인내심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어느새 시야가 확 트인 구간이 나오면 긴 여정은 끝이 난다. 반듯하게 닦인 임도를 따라 산자락을 내려오는 길, 드넓게 펼쳐진 서귀포 앞바다 풍경이 마치 다른 세상에 내려선 듯 마음을 들뜨게 만든다.
반나절을 온통 숲속을 헤매고 다녔더니 몸속에 맑고 깨끗한 기운이 차오르고 복잡했던 머릿속도 말끔히 정리되었다. 깊은 숲속의 맑은 에너지를 가득 들이마시고 온 느낌이랄까. 처음 숲으로 떠날 때 오만했던 나를 돌아본다. 숲이 다 거기서 거기가 아니다. 적어도 한라산 둘레길만큼은 그렇다.
[자료출처] http://korean.visitkorea.or.kr/kor/inut/travel/content/C03010100/view_1844151.js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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