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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정동길) 덕수궁 돌담장 길을 따라서...

꼭두쇠- 2013. 6. 16. 18:23

 

      사연이 많아 대중가요 가사에도 자주 오르내리는 덕수궁 돌담장 길~~!
 2013.06.15(토) 성 프란체스코 교육회관을 찾는 일로 덕수궁 돌담장 길을 걷게 된다.

 

덕수궁 대한문에서 출발하여 돌 담장을 끼고 정동제일교회 앞 로타리를 거쳐서

정동극장 앞을 지나 경향신문사 부근 성 프란체스코 작은형제회 교육관에서 되돌아

다시 정동제일교회 옆 주한 러시아대사관, 배제공원을 거닐며 지난날을 회상해 본다.

 

덕수궁 대한문 앞, 마침 수문장 교대식 행사가 진행 중.....

 

  지난 대중가요 속에 자주 나오는 덕수궁 돌당장 길...

 

지금은 서울시청 별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

(전에는 대검찰청과 대법원이 함께 사용했던 건물들..)

 

덕수궁 돌당장 길을 돌며, 아름답게 핀 꽃과 그림이 전시되고..

 

정동제일교회.오른쪽으로는 100주년 기념탐이 보인다...

 

정동교회 : 정동교회의 역사는 1885년 10월 11일, 미국 북감리교 선교부 목사 아펜젤러가 정동에 마련한 한옥집에 예배실을 설치하고 감리교회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인을 위한 성례식을 가짐으로써 시작되었는데, 이 날 여자 한 사람을 포함한 4명의 신자가 예배를 드리고 세례를 받았다. 아펜젤러는 이보다 앞서 1885년 6월에 입국하였으나, 당시 조선 정부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전도사업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지 않아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워 신학문 교육부터 시작하였다. 1887년에는 정동에 준공된 건물을 '벧엘예배당'이라 칭하고 첫 공개예배를 가졌으며, 같은해 한국 최초 여성과 어린이 전용병원인 정동부인병원을 개원했다.

관련자료 : http://terms.naver.com/ncrEntry.nhn?ncrDocId=135924&dicId=doopedia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결혼식 후, 기념촬영하는 신랑과 신부의 모습도 보인다.

 

정동제일교회 맞은 편으로는 서울시립미술관이 보이고..

(이 건물도 대법원과 대검찰이 함께 사용했던 건물..)

 

구, 신아일보 사옥이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동제일교회 맞은 길로, 평성문(덕수궁 서문)으로 가는 길, 덕수궁 돌담이 길~~게 이어진다.

 

정동극장을 지나 경향신문사로 빠저나가는 길..

전통예술극장으로 명성이 있는 정동극장 앞을 지난다.

 

정동극장 옆 골목을 돌아 들어가면 골목 끝에 덕수궁 중명전이 있다.

 

중명전 (重明殿) : 자료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61267 

 

중명전(重明殿) 은 1901년 지어진 황실도서관으로 처음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다. 1904년 덕수궁이 불타자 고종의 집무실인 편전이면서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었다. 1906년에 황태자(순종)와 윤비(尹妃)와의 가례(嘉禮)가 여기에서 거행되었으며,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었던 비운(悲運)의 장소이기도 하다. 일제시대에 접어들어 덕수궁을 축소시키면서 1915년에 외국인에게 임대되어 1960년대까지 경성구락부(Seoul Union)로 사용되었다. 1925년에는 화재로 인해 내부의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고 최근까지 건물의 용도와 소유주가 수시로 변경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 이후 문화재청이 매입하여 2007년 2월에 덕수궁에 추가로 편입되었다.

 

중명전 입구를 지나 경향신문사 쪽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한국예술의 내일을 창조하는 예원학교....(http://www.yewon.org/)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참된 인성과 예술적 재능을 개발하고 신장시켜

인류최고의 이상인 "자유. 사랑. 평화"의 세계를 구현하는 것을 교육이념으로 한다.

 

지금은 이화여자고등학교가 자리잡은 구 이화학당 자리... 

 

이화학당(梨花學堂)은 1886년(고종 23) 해외여성선교회에서 파견된 메리 F. 스크랜튼(Mary F. Scranton)이 서울 황화방(皇華坊), 지금의 중구(中區) 정동(貞洞)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사립여성교육기관이다. 제1대 당장인 스크랜튼의 교육이념기독교 교육을 통하여 한국여성들을 ‘더 나은 한국인으로 양성하는 것’, 즉 한국인의 긍지와 존엄성을 회복하고 진정한 한국인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이듬해인 1887년 2월에는 고종황제가 외아문을 통해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과 현판을 하사하였다. 이는 조선의 사액서원에 비견되는 것으로서 이화학당이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최초의 근대식 여학교임을 의미한다. 이화라는 교명은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을 담고 있다.   

자료출처 : http://terms.naver.com/ncrEntry.nhn?ncrDocId=712242&dicId=doopedia

 

Cafe로 사용하고 있는듯한 건물 앞 대문, 대소인원계하마(大小人員階下馬)비가 외롭다.

 

주한 케나다 대사관 건물과 주한 노르웨이 대사관 입구...

 

골목길 가운데에 버티고 있는 보호수와 기념 촬영하는 관광객...

 

창덕여자 중학교 정문.....

 

서울지방국토관리청 정문....

 

서울지방국토관리청 맞은 편에 성 프란체스코 교육회관이 있고

  

 작은형제회(프란체스코회) 건물이 보인다.

 

 작은형제회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 화단에 핀 앙증맞은 작은 꽃을 담는다.

 

 프란체스코 교육회관 앞의 모습...

 

 낮은 자세로 하늘을 우럴어 보는 수도사의 조각상이 인상 깊다.

 

  지금은 경향신문사가 사용하고 있는 구, MBC정동사옥의 건물이다.

 

경향신문사의 주 건물과 별관 건물 모습..

 

다시 정동제일교회 돌아 나와서 구 배재학당 쪽...

주한 러시아 대사관이 자리잡고 오른 쪽으로 교회가 보인다.

 

배재학당 터에는 기념관과 배재공원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배재학당(培材學堂) : 1885년 8월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인 H.G.아펜젤러가 세웠으며, 오늘날의 배재중학교·배재고등학교·배재대학교의 전신이다. 1885년 7월 서울에 도착한 아펜젤러가, 1개월 먼저 와 있던 W.B.스크랜턴의 집을 구입, 방 두 칸의 벽을 헐어 만든 교실에서 2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에 고종은 1886년 6월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 이름지어 간판을 써 주었고, 그해 10월 학생수는 20명으로 늘었다. 아펜젤러는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꾼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라고 설립목적을 밝혔고,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當爲人役)’이라는 학당훈(訓)을 내걸었다. 그리스도교인과 국가 인재양성을 위하여 일반 학과를 가르치는 외에, 연설회·토론회 등을 열고 사상과 체육 훈련에 힘을 쏟았다. 당시 배재학당에 설치되었던 인쇄부는 한국의 현대식 인쇄 시설의 효시이다.

자료출처 : http://terms.naver.com/ncrEntry.nhn?ncrDocId=72229&dicId=doopedia

 

배재공원에는 근대식 건물로 배재대학교건물이...

공원 맞은편으로는 서울등기소 건물(구,검참청부속건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