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06월 08일, 삼복같은 땡볕이 머리를 달군다.
오래전부터 약속한터라 배낭을 지고 남한산성에 오른다.
지하철8호선 "산성역"에서 하차하여 주말만 운행한다는
"남한상성종점-산성역" 간의 직행버스 "9-1번"가 반긴다.
남한산성 [출처:https://www.namhansansung.or.kr]
BC 5에 하남 위례성에서 천도해온 이후 신라 문무왕 12년(AD 672)에 토성 (주장성, 일장성라 칭함)으로 축성하였고, 조선 광해군 13년(1621년)에 후금의 침임을 막고자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 하였으나 준공치 못하고 이괄의 난을 격고난 후 인조 2년(1624)에 재 시작하여 인조 4년(1626)에 준공하였다. 1963년 1월 21일 남한산성 성벽을 국가사적 제 57호로 지정하였고, 1971년 3월 17일 남한산성 도립공원으로 지정(제 158호) 하였으며, 1976년 7월 1일 관리사무소가 개소되었다..
추가자료 [출처 : http://foresttour.tistory.com/326]
남한산성은 지금의 서울을 한산이라 불렀을 때 한산 남쪽에 있는 성이라고 하여 남 한산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북 한산성은 한산 북쪽을 방어하기 위한 산성이다. 또는 한수 이남에 있는 산성이라 그리 불렀다고 한다. 1980년대만 해도 이 성은 백제가 처음 쌓은 이성산성이 모태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발굴결과 백제 유적보다 신라의 흔적이 더 아래 지층에서 발견되어 신라가 한강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교두보로 쌓은 것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그러나 세간에는 병자호란으로 잘 알려졌다.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1637년 1월 사이의 일이다. 양력으로 환산해보면 인조임금이 이 성으로 피신한 것은 1637년 1월9일이며, 서문을 나와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를 행한 것은 1637년 2월24일이다. 농성하던 45일간은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시달린 기간이다. |
위 등산코스는 남한산성 도립공원에서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것으로 아래의 거리와 시간을 참조하여 자기역량에 맞춰서 계획해도 좋은 것 같다.
- 제1코스 (거리 : 3.8km 소요시간 : 80분)
산성종로(로타리) - 북문(0.4km) - 서문(1.1km) - 수어장대(0.6km) - 영춘정(0.3km) - 남문(0.7km) - 산성종로(로타리 0.7km)
- 제2코스 (거리 : 2.9km 소요시간 : 60분)
산성종로(로타리) - 영월정(0.4km) - 숭열전(0.2km) - 수어장대(0.6km) - 서문(0.7km) - 국청사(0.1km) - 산성종로(로타리(0.9km)
- 제3코스 (거리 : 5.7km 소요시간 : 120분)
역사관 - 현절사(0.1km) - 벌봉(1.8km) - 장경사(1.5km) - 망원사(1.1km) - 지수당(1.0km) - 관리사무소(0.2km)
- 제4코스 (거리 : 3.8km 소요시간 : 80분)
산성종로(로타리) - 남문(0.7km) - 남장대터(0.6km) - 동문(1.1km) - 지수당(0.5km) - 개원사(0.3km) - 산성종로(로타리(0.6km)
- 제5코스 (거리 : 7.7km 소요시간 : 200분)
역사관 - 동문(0.6km) - 동장대터(1.1km) - 북문(1.6km) - 서문(1.1km) - 수어장대(0.6km) - 영춘정(0.3km) - 남문(0.7km) - 동문(1.7km)
일행은 제1코스를 꺼꾸로 해서 남문 주차장입구에서 출발하여 비석거리→남문(지화문)→영춘정→수어장대(청량당)
→서문(우익문)→북문(전승문)을 돌아서 중앙주차장까지 걷기로 한다.
비석거리 : 18세기~20세기 사이에 이 곳을 거쳐간 벼슬아치들을 기념하는 비석을 한 곳에 모아 두었다. 역대 광주유수, 수어사, 부윤, 군수 등의 선정을 기리는 송덕비 군. 여기에는 헌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상규도 있고, 흥선대원군의 비석도 남아 있다.
남문(지화문) 안쪽에서 그의 웅대함을 바라본다.
남문의 밖에서 그리고 위에서 영춘정 쪽으로 길게 뻗은 성곽을 둘러 본다.
위에 올라서 바라보는 성곽의 장대함에 조상의 위대함을 생각한다.
영춘정을 바라보며 길게 뻗어가는 성곽길...
어릴 때에 연한 새순을 따먹던 찔룩이라는 찔레꽃이 반갑다.
영춘정을 앞두고 잠깐 뒤를 돌아 본다.
영춘정을 위로 잠깐의 비탈진 길을 걷고
비교적 평평하고 넉넉한 공간을 만난다.
영춘정은 일명<팔각정>이라고도 하는데 남문아래 있던것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성곽둘레길 가장자리의 초목들...그 생명력에 놀란다.
수어장대로 올라가는 길에 암문(감춰진 통로)으로는 등산객이 들고난다.
청량당, 수어장대 부근의 모습..
장졸들이 모여서 회의나 술자리를 즐겼을 법한 자리 ????
죽은 것 같으나 아직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티는 나무...
청량당이 눈에 들어오고, 수어장대는 가려서 보이질 않는다.
수어장대와 청량당의 역사를 말해주는 안내판..
청량당 앞의 보호수가 역사를 말해 주는 듯...
청량당 뜰에서 바라본 수어장대..보호수가 반갑게 인사하는듯....
장수들의 호령이 울릴듯...수어장대의 위용을 본다.
[수어장대 (守御將臺)] [출처:https://www.namhansansung.or.kr]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부에 세워져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건물은 남한산성의 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며, 2층 누각과 건물의 왼쪽에 2동의 사당인 청량당으로 이루어졌다. 이 건물은 선조 28년 남한산성 축성 당시 동남북의 3개 장대와 함께 만들어졌으며 유일하게 현존한다.
원래 단층누각으로 축조하고 '서장대' 라 부르던 것을 영조27(1751)에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이층누각으로 증축하고 안쪽에는 무망루, 바깥쪽에는 '수어장대' 라는 편액을 내걸었으며, 서대라고도 불렀다. 수어장대의 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 상층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양식의 2층 누각이다. 지붕은 상하층 모두 겹처마루를 둘렀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올렸으며 용마루에는 취두를 올렸다. 건물의 기둥은 높이 60cm의 팔각장주초석 위에 올려져있고, 포는 주심포 양식의 이출목익공식이다. |
이 성에는 모두 5군데에 장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이 곳만 남았다. 서쪽 장대라 하여 원래 서장대라고 불렀다. 영조 27년(1751년)에 왕명으로 증축하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고 한다. 2층에는 무망루라는 편액이 달려 있는데 영조 임금이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였다고 한다.
수어장대 뜰의 좌측 구석에 버티고 있는 매바위의 모습이지만,
음각으로 세겨진 글자의 윤곽도 흐리고 무슨 글자인도 ????
[매바위] 자료:http://blog.daum.net/jinkyo10004/7566723
남한산성의 동남쪽 축조를 맡았던 이회(李晦)가 완벽한 시공과 지세의 험악으로 기일내에 완공하지 못하고, (경비를 탕진했다는 누명을 쓰고) 참수형(斬首刑)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절명(絶命)하는 순간 매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 바위에 앉아 이회를 응시하다 갑자기 없어졌다. 사람들이 매가 있던 곳에 가보니 매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손실되어 흔적만 남아있다. |
무망루
[무망루. 無忘樓] 자료:http://blog.daum.net/jinkyo10004/7566723
조선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李箕鎭)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內便) 문루로서 그 편액(扁額)이 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懸板)을 새로 설치하여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였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혔다가 귀국 후 북벌(北伐)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 지은 것이다. |
수어장대를 호위하는 것 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보호수..
청량당은 들어갈 수 없어 울넘어서 살짝 구경만 한다.
[청량당(淸凉堂)] [출처:https://www.namhansansung.or.kr] 이 성을 쌓은 팔도 도청섭인 벽암 각성대사와 함께 이회와 그의 부인의 영혼을 모신 사당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 되어었다.
이회는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로 충직한 인물인데 그를 시기한 무리의 모함으로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 후 이회의 무고함이 밝혀진 이후 수어장대 서쪽에 그와 부인의 영혼을 위안할 목적으로 청량당이 세워졌다고 한다. '청량당'이란 이름은 서장대가 서 있는 산이 곧 청량산이므로 산명을 당집이름으로 부른 것이며 '청량' 은 '맑고 서늘한 기운'을 뜻한다.
청량당은 서장대 서편 1단을 내려서 지어져 있다. 사당은 2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당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건물의 가구는 굴도리식이며 주심포 양식의 기둥을 하고 있다. 본당의 중앙에는 4쪽 여닫이 격자 문을 달고 좌 우측 칸에는 높이 175cm에 정면과 측면에 창문을 각각 내었다. 청량당 대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 건물인데 좌 우측의 칸은 각각 격자 문을 달아 방으로 꾸몄고 출입문 중앙은 2쪽 여닫이 대문을 달고 문 위에는 홍살을 장식하였다. |
예 선조들의 애환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초록의 새잎은 새로움을 과시한다.
서문으로 올라가는 길...
서문 위를 걸어서 성곽길을 재촉해 나간다.
매탄터 : 장성을 수축할 때에 필요한 목탄을 굽던 곳...
암문...(적병 몰래 성을 드나들던 감춰진 출입구)
서문(우익문)에서 암문을 지나 북문(전승문)으로 가는 성곽길..
북문으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뒤돌아 청량산을 바라본다.
북문(전승문)을 향하여 발길을 재촉한다.
이제 오늘의 목적지인 북문(전승문)에 도착한다.
남문(지화문) 못지 않은 북문(전승문)의 모습을 안쪽에서 바라본다.
북문을 지나서 주차장으로 향해 가는 길에서 행궁쪽을 바라보며...
남한산성의 한 부분을 답사하는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