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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장충단 공원에서 남산 팔각정거쳐 백범광장까지....

꼭두쇠- 2012. 11. 30. 16:05


2012년 11월 23일, 고향에서 올라오신 형님과 남산을 걷기로 하고

장충단 공원에서 부터 남산 팔각정을 경유하여 서쪽능선 길을 따라서

안중근의사 기념관 광장을 거쳐서 백범광장으로하여 청계천까지 걸었습니다.

 


오늘도 장충단 공원에는 엷은 안개가 끼었고 요절한 가수 배호가 생각나게 합니다.

사진은 공원입구의 장충정, 오른쪽 멀리 장충단 터가 보입니다.

 

 안개낀 장충단공원  노래:배호

 

안개낀 장충단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날 이자리에 새긴 그이름 뚜렷이 남은 이글씨
다시 한번 어루만지며 돌아서는 장충단공원


비탈길 산길을 따라 거닐던 산기슭에
수많은 사연에 가슴을 움켜주고 울고만 있을까
가버린 그사람이 날긴 발자취 낙엽만 쌓여 있는데
외로움을 달래 가면서 돌아서는 장충단공원

장충단 공원

 

장춘단 공원은 지하철 3호선 동국대역 6번출구를 나오자 마자 앞에 있으며 국립극장과 남산산책로를 오르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고, 장춘단비, 수표교, 사명대사동상, 이준열사동상 등 역사유적이 있는 곳이다.

  

장충단터는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때에 순국한 대신과 장병들을 제사하기 위하여
광무4년(1900년)에 설치했던 제단터이다,

 

 

이 수표교는 원래 청계천에 설치된 다리였으나, 이전한 것임.

 

수표교(水標橋)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있는 조선 초기의 돌다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길이 27.5m, 너비 7.5m, 높이 4m. 이 다리는 1406년(태종 6) 인공으로 만든 개천(청계천) 위에 가설된 것 가운데 하나이며. 청계천에 수표(水標)가 처음 세워진 것은 1441년(세종 23)인데, 이때는 나무로 된 것이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후대에 보수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원래 이 다리는 청계천 위에 놓여 있었는데,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 공원 입구로 옮겨졌으며. 물 속에 있던 수표석(보물 제838호)도 함께 장충단 공원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장충단 공원의 남쪽방향에 설치된 인공폭포~!

 

이준열사 동상은 동국대학교 건물을 뒤로하고 서 있고,

 

순국열사 이한웅 기념비가 그 옆에 건립되어 자리를 지킵니다.

 

장충단 공원 경내를 벗어나서 국립극장으로 가는 남산 북쪽 순환도로..

 

국립극장을 지나서 남산 정상으로 가는 길목의 소나무...

 

멀리 서울 N-tower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고..


팔각정에는 오전시간임에도 많은 관광객들이..

 

남산타워에 마련된 사랑의 언약을 맹세한 갖가지 형태의 잠을쇠들...

 

많은 언약의 잠을쇄로 만든 (성탄)트리모양의 조형물..

 

서울타워 앞에 마련된 조형물..

 

때마침 진행되는 봉수대 파수꾼들의 재연공연 모습..

(봉수대 파수꾼의 재연공연은 매일 10:00 ~ 12:00까지 있고

근무병들의 진검승부 대련공연은 15:00!~14:00까지 있다 함)

( 관련자료 : http://blog.daum.net/rgo2000/218 )

 

남산봉수대 : 남산 봉수대는 조선 태조 3년(1394)에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뒤 설치하여, 갑오경장 다음해까지 약 500년간 사용되어 왔다. 남산의 옛 이름을 따서 목멱산 봉수대라 하기도 하고, 서울에 있다하여 경봉수대라 부르기도 하였다. 평상시에는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불을 올리도록 하였다. 남산 봉수대는 전국의 봉수가 도달하게 되는 중앙 봉수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곳이다.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여 5개소가 있었다 하는데, 현재 봉수대는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으며 1개소를 복원하였다.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장두봉 포토아일랜드: 서울의 중앙부가 한눈에 들어 옵니다.

 

서울교육연구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
(5.16직후에는 어린이회관으로 사용하기도 했지요..)

 

남산 케이블카는 오늘도 부지런히 관광객들을 실어 오르 내리고...


공원의 비들기 떼는 모이를 줍기에 여념이 없는듯 보입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뜰에 설치된 "민족정기의 전당" 석조 조형물..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좌측 :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見危授命),
우측 :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見危授命) :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치라. 여기서 견리사의(見利思義)와 견위수명(見危授命)은 안중근 의사가 100년 전에 여순 감옥에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자신의 철학과 심경을 피력하였던 간절한 마음이 읽혀지는 내용이다.
   견리사의는 이익 보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익을 얻는 과정이 정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따져보라는 뜻이다. 이익이 된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쫓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말미에 '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경술이월 어려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 :
  안중근이 1910년 3월 옥중에서 쓴 행서 글씨 두 폭이다. 그 가운데 한 폭은 오른쪽 위에 "증안강검찰관"이라 쓰여 있듯이 안중근 의사가 이곳에 있을 때 자신의 취조를 담당했던 여순검찰청 야스오카 세이시로 검찰관에게 써준 것이다.

  야스오카는 사망하기 직전 이 유묵을 큰딸 우에노에게 물려주었고, 그 뒤 동경 국제한국연구원의 최서면 원장을 통하여1976년 2월 11일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되었다.
   선지에 모두 여덟 글자를 한 줄에 썼는데, 내용은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라는 뜻이다. 말미에 "경술년 3월 여순 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이라 낙관하고 왼쪽 손바닥으로 장인을 찍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뒤로 "인무원여 난성대업(人無遠慮 難成大業)" 조형물

 

인무원여 난성대업(人無遠慮 難成大業) :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는 것이다. 마치 논어 위령공 편에서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필히 가까운 근심이 있게 된다'는 구절을 응용한 듯하다. 즉, 먼 장래를 내다보는 원대한 계획이 없이 그저 눈앞의 것만을 생각하면 필히 아침저녁으로 급박한 걱정이 생길 것이며, 그러면 결코 대업을 이루기 어렵다는 뜻이다. 또 좌씨전 양공 편에 '자는 멀리 생각하고 소인은 가까운 것을 좇는다'라는 구절도 있듯이 먼 장래를 생각하는 군자의 도리를 언급한 것이다.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말미에 '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경술이월 어려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기년관앞에 세워진 "한얼"이리는 이름의 조각품..

 

안중근의사 기념관 뜰에 설치된 갖가지 형태의 석조 조형물...

 

지사인인 살신성인 (志士仁人 殺身成仁)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내 몸을 바쳐 대업을 이룬다는 말씀...

 

백범광장에 새워진 임시정부 수반이셨던 백범(김구)선생 입상...

원래 이곳은 이승만대통령의 동상이 있던 곳이었으나,
4.19혁명 이후 동상을 허물고 김구선생의 동상을 세웠다고....

 

초대 부통령을 지내셨던 성재(이시영) 선생 좌상...

 

남산 서쪽능선을 따라 복원한 서울(남산)성곽...

새롭게 복원된 성벽의 돌들이 자연스럽지 않아, 조금은 이질감이 느껴지네요...